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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6] [최영주 교수] 수학사에 성취를 남긴 여성 수학자 29명
최고관리자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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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2월 20일, 미국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 공군 기지. 미국 항공우주국(나사·NASA)은 미국 최초로 지구 궤도 비행에 나설 유인 우주선 프렌드십 7호 발사를 앞두고 긴장감에 휩싸였다. 소련의 보스토크1호보다 10개월이나 늦은 시점이었다. 발사각, 궤도 진입각과 속도, 지구 재진입 위치와 시각까지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당대 최고 성능의 아이비엠(IBM) 7090 컴퓨터가 비행 궤도를 계산했다. 발사 초읽기를 앞두고 존 글렌 선장이 말했다. “캐서린 존슨 씨에게 이 계산을 확인하게 해주십시오. 그 여성(girl)이 계산이 맞다고 하면 즉시 출발하겠습니다.” 존슨이 탁상용 계산기와 필기로 검산을 마친 뒤 우주선은 순조롭게 발사됐다. 미국 영화 <히든 피겨스>(2016)에서 재조명됐던 것처럼, 존슨은 이공계 엘리트들이 모인 나사에서도 단연 뛰어난 수학자였지만 흑인이자 여성이라는 이유로 투명인간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우리가 수학을 사랑한 이유>(전혜진 지음, 다드래기 그림, 지상의 책 펴냄)는 대학에서 수학·기계공학·컴퓨터과학을 공부한 소설가 전혜진이 쓴 ‘불가능한 꿈을 실현한 29명의 여성 수학자 이야기’(부제)다. 시대와 장소는 다르지만 차별과 편견에 맞서 수학사에서 불멸의 성취를 남긴 이들의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국의 수학자 4명도 포함됐다.


16세기 화가 라파엘로는 걸작 <아테네 학당>에 54명의 걸출한 철학자들을 그렸다. 이중 유일한 여성이 바로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히파티아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이던 아버지 테온과 함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서 <알마게스트>에 주석을 붙였고, 원뿔곡선 연구에 대한 해설서를 썼으며, 천문관측 도구와 수중 투시경을 개선했다.


20세기 초 독일 수학자 에미 뇌터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을 수학적으로 정리했다. 1933년 히틀러의 집권은 유대인·사회주의자·페미니스트였던 뇌터에게 재앙이었다. 뇌터는 역시 유대인이던 아인슈타인이 앞서 망명한 미국으로 갔고, 아인슈타인이 머물렀던 프린스턴대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 명물학으로 이름 높았던 서씨 집안의 영수합 서씨는 <산학계몽>의 방식보다 더 간단한 사다리꼴 넓이 구하기 풀이를 만들었고, 뒷날 실학자가 된 아들에게 수학과 기하학을 가르쳤다. 일제 강점기 홍임식은 조선에선 가르치지 않았던 수학을 배우려 일본에서 유학했다. 해방 뒤에도 수학에 대한 열망으로 다시 일본의 지도 교수를 찾아가 한국 최초의 수학 박사가 됐지만, 끝내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최영주(62)는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수학적 진리)을 쫓아 임신 4개월째에 포항공대 최초의 여성 수학교수로 부임했고 정수론의 새 방향을 개척했다. 미국 예일대 최초의 수학과 종신교수가 된 오희(52)는 서울대 재학 시절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하며 변혁을 꿈꿨으나 수학 사랑을 포기할 순 없었다.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아 수학 시험 답안지에 정답과 풀이 대신 ‘학생운동 이유서’를 써냈던 일화는 한 시대의 단상을 잘 보여준다.


이란 수학자 마리암 마르자히니는 역학과 기하학 분야의 탁월한 업적으로 여성 최초로 수학계 최고의 필즈상(2014)을 받았다. 갓 태어난 아이를 키우는 중에도 동료들과 당구를 치며 다각형 테이블에서 당구공의 궤적을 연구해 논문을 발표하는 열의를 불태웠으나 2017년 유방암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필즈상 수상 기자회견에서 마르자히니는 이런 말을 남겼다. “수학을 하는 데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닙니다. ‘내가 재능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죠. 자신 안에 깃들어 있는 창조성을 발현해줄 자신감을 가지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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